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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11 [책리뷰] 그 집 앞 - 이혜경 2

 

그 집 앞 이혜경(299pp)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다.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가장 마지막에 서는 정류장에 우리 집이 있었다. 낡은 연탄, 금이 간 외벽, 천장에 매단 거미줄, 옆집에서 나는 소똥 냄새. 둘러보면 우리 집과 같이 낡은 지붕을 인 몇 채에 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그런 자그마한 동네에서 자랐다. 몇 걸음만 떼면 다 산이고, 밭이었던. 공원이 아니면 흙 한 번 밟아보기 힘든 지금에 내 동네와는 너무 달라 떠올린 적 없던 그 시절에 그 풍경이 책을 읽자 떠올랐다. 책이 가진 배경은 그보다 먼 소실이 있고, 주인공에게 전쟁을 겪은 아버지가 계시고, 교복에 풀 먹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배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책은 <그늘바람꽃>,<그 집 앞>,<어스름녘>,<가을빛>,<귀로>,<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떠나가는 배>,<젖은 골짜기>,<우리들의 떨켜>들로 이루어진 중단편집이다. 주로 번역 책을 읽는 내게는 조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꽤 있었다. 몇몇 단어들은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소설이 가진 각각의 사연 역시 내게는 꽤 낯설었다. 처음 아래의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이게 뭐가 싶을 정도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질문한 상대는 눈치챈 부분을 주인공이 직접 서술하기 전까지는 짐작도 못 했다. 그녀가 말하는 큰어머니가 본처고 주인공이 부르는 엄마가 첩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시대는 정말 이랬나? 싶을 정도로 낯선 관습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그렇구나, 큰어머니가 같이 사셔? 큰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큰아버지요? 안 계세요.”
“큰아버지가 안 계시다니, 어디 멀리 가셨나 보구나.”
“아니요. 한 번도 못 봤어요.”

 하지만 읽다 보니 그런 낯섦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재밌었다. 아마 그건 작가가 섬세하게 써내려간 문장력 덕분인 것 같다. 주로 아픈, 심정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의 심리를 작가는 표현했는데 그 심정을 묘사하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가슴을 흔들었다. 특히 단편 중 <그 집 앞>에 유독 그런 문장이 많았던 것 같다.

 “사랑은 어떤 것일까. 이제 나는 그 애들에게 대답할 수 있다. 사랑은, 다 만든 인형 같은 것이다. 만들 때는 이리저리 설레고 꿈을 꾸는 듯하지만, 일단 형태를 갖추고 나면 인형은 독자적인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만든 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재봉틀을 꺼내 색동조각을 잇고 누벼 베갯모를 만들거나 내 옷을 만들어줄 때, 나는 그 곁에서 나오는 자투리 천으로 인형을 만들었다. 이불깃이나 베갯잇으로 흔히 쓰이던 광목이나 옥양목은 인형의 몸을 만드는 데 알맞았다. 연필로 본을 떠서 바늘로 꿰매어 몸통이며 머리를 만들고, 팔다리를 만들고, 운 좋으면 그 안에 솜을, 그렇지 않으면 가윗밥으로 남은 자투리 천을 잘게 가위질해 뜨개바늘로 밀어 넣으면 몸통은 완성되었다. 털실로 가르마를 탄 머리를 만들고, 거기에 볼펜으로 눈이며 입을 그려 넣고 옷을 입히면 인형은 언제 조각헝겊이었냐는 듯 목숨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곤 했다. 행복한 건 거기까지였다.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생명, 허술히 대접해서는 안 되는 생명을 얻어버려 거북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집 앞> 75pp


 어디선가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그들은 쉬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고뇌하고, 혹은 외면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하고 평했다. 나처럼. 물론 읽으면서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너무 젊었고, 그들은 내가 겪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번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직, 고부갈등, 장례, 치매 같이 내가 느끼기에 너무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그들이 괴로워할 때면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거리감을 메어주던 세심한 감정묘사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집 앞> 다음으로 좋았던 <젖은 골짜기>에 주인공은 이같이 말한다.

 

 ‘이십 대에는 저런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왔지요.’

 

 나도 그와 같다. 다 읽었지만 그들의 사정이 다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이십 대가 지나고, 그들과 같이 늙어 갈 때쯤이면 또 모르겠다. 그때쯤 읽으면 뭔가 지금과 다르게 감동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 서재에 오래도록 둘 책 한 권이 늘었다.

 

-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걸으라는 마음이었겠죠. 길 바깥으로 뛰어내릴 용기도 없으면 그저, 그 길이 끝나면 무언가 다른 풍경이 나오려니 하면서 걸을 수밖에요. 그래도 끝내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저 그랬나보다. 그러고 마는 거지요."

 

<그 집 앞>238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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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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