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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이혜경(299pp)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다.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가장 마지막에 서는 정류장에 우리 집이 있었다. 낡은 연탄, 금이 간 외벽, 천장에 매단 거미줄, 옆집에서 나는 소똥 냄새. 둘러보면 우리 집과 같이 낡은 지붕을 인 몇 채에 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그런 자그마한 동네에서 자랐다. 몇 걸음만 떼면 다 산이고, 밭이었던. 공원이 아니면 흙 한 번 밟아보기 힘든 지금에 내 동네와는 너무 달라 떠올린 적 없던 그 시절에 그 풍경이 책을 읽자 떠올랐다. 책이 가진 배경은 그보다 먼 소실이 있고, 주인공에게 전쟁을 겪은 아버지가 계시고, 교복에 풀 먹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배경이었는데도 말이다.

 책은 <그늘바람꽃>,<그 집 앞>,<어스름녘>,<가을빛>,<귀로>,<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떠나가는 배>,<젖은 골짜기>,<우리들의 떨켜>들로 이루어진 중단편집이다. 주로 번역 책을 읽는 내게는 조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꽤 있었다. 몇몇 단어들은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소설이 가진 각각의 사연 역시 내게는 꽤 낯설었다. 처음 아래의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이게 뭐가 싶을 정도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질문한 상대는 눈치챈 부분을 주인공이 직접 서술하기 전까지는 짐작도 못 했다. 그녀가 말하는 큰어머니가 본처고 주인공이 부르는 엄마가 첩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시대는 정말 이랬나? 싶을 정도로 낯선 관습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그렇구나, 큰어머니가 같이 사셔? 큰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큰아버지요? 안 계세요.”
“큰아버지가 안 계시다니, 어디 멀리 가셨나 보구나.”
“아니요. 한 번도 못 봤어요.”

 하지만 읽다 보니 그런 낯섦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재밌었다. 아마 그건 작가가 섬세하게 써내려간 문장력 덕분인 것 같다. 주로 아픈, 심정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의 심리를 작가는 표현했는데 그 심정을 묘사하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가슴을 흔들었다. 특히 단편 중 <그 집 앞>에 유독 그런 문장이 많았던 것 같다.

 “사랑은 어떤 것일까. 이제 나는 그 애들에게 대답할 수 있다. 사랑은, 다 만든 인형 같은 것이다. 만들 때는 이리저리 설레고 꿈을 꾸는 듯하지만, 일단 형태를 갖추고 나면 인형은 독자적인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만든 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재봉틀을 꺼내 색동조각을 잇고 누벼 베갯모를 만들거나 내 옷을 만들어줄 때, 나는 그 곁에서 나오는 자투리 천으로 인형을 만들었다. 이불깃이나 베갯잇으로 흔히 쓰이던 광목이나 옥양목은 인형의 몸을 만드는 데 알맞았다. 연필로 본을 떠서 바늘로 꿰매어 몸통이며 머리를 만들고, 팔다리를 만들고, 운 좋으면 그 안에 솜을, 그렇지 않으면 가윗밥으로 남은 자투리 천을 잘게 가위질해 뜨개바늘로 밀어 넣으면 몸통은 완성되었다. 털실로 가르마를 탄 머리를 만들고, 거기에 볼펜으로 눈이며 입을 그려 넣고 옷을 입히면 인형은 언제 조각헝겊이었냐는 듯 목숨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곤 했다. 행복한 건 거기까지였다.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생명, 허술히 대접해서는 안 되는 생명을 얻어버려 거북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집 앞> 75pp


 어디선가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그들은 쉬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고뇌하고, 혹은 외면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하고 평했다. 나처럼. 물론 읽으면서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너무 젊었고, 그들은 내가 겪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번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직, 고부갈등, 장례, 치매 같이 내가 느끼기에 너무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그들이 괴로워할 때면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거리감을 메어주던 세심한 감정묘사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집 앞> 다음으로 좋았던 <젖은 골짜기>에 주인공은 이같이 말한다.

 

 ‘이십 대에는 저런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왔지요.’

 

 나도 그와 같다. 다 읽었지만 그들의 사정이 다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이십 대가 지나고, 그들과 같이 늙어 갈 때쯤이면 또 모르겠다. 그때쯤 읽으면 뭔가 지금과 다르게 감동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 서재에 오래도록 둘 책 한 권이 늘었다.

 

-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걸으라는 마음이었겠죠. 길 바깥으로 뛰어내릴 용기도 없으면 그저, 그 길이 끝나면 무언가 다른 풍경이 나오려니 하면서 걸을 수밖에요. 그래도 끝내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저 그랬나보다. 그러고 마는 거지요."

 

<그 집 앞>238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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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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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 기시 유스케(412pp)

 

 

 

소설은 한신 대지진으로 무너진 곳을 주인공인 유카리 걷는 것부터 시작된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로가 금이 가고,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망가진 건물들 사이로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일상적이라 꽤 이질적이다. 그건 당연할지 모른다. 그들은 조금만 전철을 타고 나가면 이곳에 절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평범한 도시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건너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벼운 불평을 내뱉으며 금이 간 도로를 밟는다. 유카리 역시 그 중 한 명으로 한순간에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고 공황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자원봉사자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능력이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내려온 것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갖춘 그녀는 어릴 때는 그 덕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잉으로 점차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결국 사춘기 때에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자살기도까지 하게 된다. 다행히 병원에서 능력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방법을 깨닫게 된 그녀는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다 여유 있게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평소에는 약을 먹고, 평범하게 지내지만 이렇게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일시적으로 약을 끊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타인을 돕는 게 일상적이었다. 치히로는 그런 그녀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온 아이였다. 겉보기에는 한신 대지진로 머리를 다친 아이에 불과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다양한 인격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카리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치히로에게 연민을 느꼈으며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 절박한 바람에는 그녀를 자신과 같이 보는 동질감 역시 짙게 깔렸을 것이다.

 소설은 그런 치히로의 인격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달려가는 듯 보이다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소녀의 낯선 인격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낯선 인격이 가진 ‘이소라’라는 이름부터가 다른 인격과 이질감이 느껴졌다. 보통 [한자 사전]에서 필요한 뜻을 가져다 짓는 인격의 이름과 달리 그건 [기비쓰의 가마]라는 단편집에 등장하는 귀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죽여?’

 위험한 말을 서슴없이 속삭이는 인격을 유카리가 경계하면서 소설의 갈등은 시작된다. 유카리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하려 노력하는 선한 인간이었고, 이소라는 철저한 악인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그 뻔한 대치가 이 소설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설 중반까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아마 소설이 표면적으로 들어내는 유체이탈, 무속신앙, 다중인격 같은 것들에 흥미가 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극이 지날수록 나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아래의 쓴 소설 중반에 유카리가 가진 의문이, 읽을 당시에는 그저 넘어갔던 암시나 떡밥들이 마지막에 합쳐져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실은 각각의 인격들은 치하로가 조종하는 인형에 지나지 않으며, 치하로의 다중인격장애도 결국 광기 어린 한 사람의 연극에 불과한 게 아닐까?’ <13번째 인격> 118pp

 그 전에 읽었던 기시 유스케에 담담하면서 잔인한 묘사들은 이 소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 여린 살인귀에게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중간에 고비도 있었지만 결코 읽은 게 후회되는 책은 아니었다.

 

-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마술'은 반드시 어떤 함정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286pp)

"결국 감정 그 자체에는 의미가 전혀 없고, 타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만 진화해왔다는 말인가요?"(345pp)

     <13번째 인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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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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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 이원석(183pp)

 

 

 필자는 무언가를 하기 전에 관련 서적을 사는 게 습관처럼 굳어진 사람이다. 요리를 배우고 싶으면 요리책을, 여행을 가려면 그 관련 서적을두 권은 읽어야 맘이 편한 그런 사람이다. 물론 시작만 할 뿐 결국 책만 서재에 쌓이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서재에 요리책은 서너 권이 넘는데 그때 같이 부엌칼이 책과 나란히 먼지만 먹고 있는 게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책도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하고자 마음먹고 구매한 책 중 하나이다. 위에 보다시피 손바닥만 한 작은 책으로 분량이 많지 않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체 역시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여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빈약한 분량만큼 내용이 별로 없어 다 읽고 나서 썩 마음에 들었던 책은 아니었다. 특히 저자는 크게 서평의 본질과 서평의 방식을 따로 나눠 설명했는데 초반에 설명한 그럴듯한 논리가 후에 쓴 짧은 글귀에 무너지는 걸 보고 '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뭘까?' 싶었다. 저자는 초반 서평의 본질을 설명할 때 아래와 같이 비교해 말한다.

"독후감이 독백이라면, 서평은 대화입니다. 독후감은 독자가 없어도 됩니다. 혼자 쓰고 끝내도 상관없지요. 감정을 풀어 놓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반면 서평은 이를 읽어줄 독자가 필요합니다. 서평의 독자는 서평에 반응합니다. 즉 서평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서평을 쓰는 이와 서평을 읽는 이의 대화입니다. 서평을 쓰면서 서평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독자를 설득하고자 성찰하며 언어와 논리를 구성하고 배열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성찰은 정련되며, 정신의 성숙을 이루기도 합니다." -<서평 쓰는 법>25pp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여기까지는 저자가 말하는 서평의 본질이 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후에 그 서평을 쓰는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만든 서평의 정의를 무너트렸다.

"서평의 분량은 원칙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단 한 줄의 서평도 가능하고……. (중략)" -<서평 쓰는 법> 165pp

단 한 줄로, 위에 저자가 말한 내용을 다 담을 수 있을까, 그런 한 줄짜리 글을 초반에 독후감이나 그런 류에 글로 지정해 비교했던 거 아니었나. 물론 글 맥락을 보면 저자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별로 많지 않은 내용, 그것도 스스로 후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많은 사례를 제시해서 정작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그중 3분 2 정도는 되나 싶을 정도로 적은 양에 내용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그렇게 장황하게 쓰면 읽는 이는 실망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책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모호하긴 하지만 읽으면 기초적인 서평의 종류나, 방식 등을 배울 수 있고, 가장 큰 장점은 저자가 좋은 서평의 길잡이 역할을 자처해 다른 좋은 서평을 찾아보기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좋은 서평을 쓰려면 좋은 서평을 많이 읽어야 하는기본 중의 기본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수고스러움을 조금 덜어주니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라 온전히 제목처럼 <서평 쓰는 법>을 자세히 배워보고 싶어 읽어보려고 하는 거라면 솔직히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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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책은 항상 새롭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서평을 통해 구현된다."

                    <서평 쓰는 법>30pp

 

 

 

 

 

 

 

 

 

Posted by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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